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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by 선샤인우주 2021. 3. 12.


  책 <미래에서 온 편지>을 다 읽고 덮는데 갑자기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를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예매와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정말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그전까지 '안나 카레니나'가 공연 중이라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에서 나는 그저 참여자일 뿐이었다. 다음 주까지 기다릴 수 없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의 만류와 서운함을 뒤로하고 설날, 꿋꿋이 혼자 안나를 만났다.

  그간 더 비싼 값을 지불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좌석에 앉게 되었다. 처음으로 비지정석에 앉았는데 참으로 운이 좋았다. 다른 좌석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내 앞에만 텅텅 비어있어서 참 신기했다. 모세의 기적처럼 "수진아 잘 봐." 하는 신의 뜻 같았다. 덕분에 수동으로 옮겨지는 무대와 발레슈즈가 무대 바닥에 쓸리는 소리, 춤추는 배우들의 섬세한 손끝, 감정이 담긴 어깨 내림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안나의 애절함과 불같은 사랑이 슬프고 가슴을 절절하게 만들었지만 난 이제 안나 카레니나나, 프리다칼로 같은 삶보다 키티의 삶이 더 좋아졌다. 사랑을 잃고 철길에 뛰어들고자 했던 키티는 더 없는 사랑을 받으며 행복과 용서를 배웠다. 화려하고 불같은 브론스키... 이제 브론스키같은 남자는...

  언제나 뮤지컬이 주는 에너지가 있다. 색조 화장품이나 명품에는 관심이 없는 대신에 뮤지컬이나 마음치유에 큰 힘을 쓰는 내가 좋다. 너무 잘나고 싶고, 특별하고 싶었던 그 시기를 지나니 법륜 스님 말씀대로 나는 그저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시 그런 시기를 지나,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게 참 좋아졌다. 이런 이십 대 아가씨가 있나 싶을 정도로 외모와 내면이 프리한 내가 좋다. 이런 게 나의 특별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특가로 저렴하게 본 게 미안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중간에 쉬는 이십분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몰입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잠들었다. 다시 깨어난 오늘, 하나씩 곱씹어 보니 신은 내게 키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이로써 그간 안나같았던 삶은 청산이다. 내 안에 안나 카레니나, 안녕.

2018년 2월 17일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이상국

산에 가 돌을 모아
탑을 쌓고 서원을 했다.
돌도 나를 모르고 나도
돌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게 돌에다 한 것인지
내가 나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탑을 쌓은 나와
탑을 쌓기 전의 내가 다르듯
탑이 된 돌들도 이미
그전의 돌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남은 아니었다.

그곳이 산천이거나 떠도는 허공이거나
우리가 무엇으로는
치성을 드리고 적공을 하면
짐승들도 함부로 하지 않고
비바람도 어려워하는 것 같았는데

산에 가 돌로 탑을 쌓고 서원을 했다.
돌도 돌만은 아니었고
나도 나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와 나
사이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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