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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안규철

by 선샤인우주 2021. 10. 19.

안규철 작가님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다녀온 뒤로 이력과 전시, 출판한 책에 대해서 찾아봤다.
이미 대출중인 책은 예약을 걸어놓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을 먼저 읽었다.
기말고사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한채, 앉은 자리에서 2시간만에 다 읽었다.
한 번 읽고 말기엔 아까운 책이라 굳이 대출을 해서 기록을 남긴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재산이 눈 앞에 전시로 나타나기까지의 시간, 감성, 꾸준함이 보이는 글이다.
책은,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이야기해주는 느낌이라 참 좋다. 어떻게 이런 따뜻한 생각을 하시는 걸까?
감성과 미적감각이 부럽다. 이 작가님께 수업 듣는 학생들은 참 복받은 친구들이란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창가에서

그런데 한 가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공부 시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
그 벌이라는 것이 특이하게도 창문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설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길 건넛집 빨랫줄에는 빨래가 널려 읶고 마당에 해바라기가 피어 있고 해바라기 옆에는 담장이 있고 담장 너머에는
가게가 있고 가게 앞 공터에는 강아지가 낮잠을 자고 있어요..." 하는 식이다. 벌을 받는다기보다는 무슨 새로운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생략) 그것은 종이 위에 물감 대신 말로 풍경화를 그리는 일과 같았다. 내게 그것은 일생일대의 발견이었다.
나는 때때로 또래들과의 놀이에서 빠져나와 세상에 대한 골똘한 관찰자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지금의 삶으로 이끌었다.



자기 고백을 위한 가구

고백은 공허한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절박한 몸짓이다. 고해성사나 심리 상담처럼 고백을 통한 삶의 긍정을 제도화한
형식들이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도 없고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기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기 고백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고백의 형식을 만들고, 우리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의 고백을 위한 가구이다.



공항의 사물들

그러나 세상에는 이렇게 분명한 물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 여러 개의 이름이 있는 것, 이름이 계속 바뀌는 것,
이름과 그 것이 지칭하는 사물 자체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 아무런 실질적인 용도가 없는 것, 용도가 무엇인지를
아무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 경계선에 걸쳐 있어서 어느 범주로도 딱히 분류하기 어려운 것, 상식 밖에 있는 것,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그 앞에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오히려 이런 사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새해 소망

나의 올해 소망은 세상의 일들로부터 한발 물러나 나의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해 온전히 낭비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꿈꾸었으나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에 더욱 간절한 소망이다.



구름 메세지 & 구름이나 한 점

구름은 매 순간 변한다. 지금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은 구름은 내 일생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러니 전형적인 구름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양떼구름, 새털구름, 뭉게구름 따위의 이름이 있긴 하지만 각각의 구름은 모두 다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본다. 거기에는 동물의 형상도 있고 그리운 사람의 얼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구름 속에 혹시 내가 읽을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이 없는지 찾아본다. (...) 구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물의 형태를 닮으려는 의지가 없다.


양의 탈을 쓴 늑대 / 늑대 탈을 쓴 양

바로 그 때 지평선 너머에서 총을 든 사냥꾼이 나타났다.
늑대의 탈을 쓴 양과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발견한 사냥꾼은 곧바로 늑대의 탈을 쓴 양을 겨냥해 총을 쏘았다.
사냥꾼은 총소리에 놀라서 양의 탈을 벗어던지고 황급히 달아나는 또 한마리의 늑대를 겨냥해서 다시 총을 쏘았다.

좋은 글과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 내가 참 좋았던 글들만.
그런데 내가 좋아했던 구절을 다 담으려면 책 한권 전부를 써야할 것 같다.

2015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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